자사사 연립 정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자사사 연립 정권은 1994년 6월 일본에서 자유민주당(자민당),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가 연립하여 출범한 정권이다. 1993년 총선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후, 자민당은 사회당과의 연립을 모색했고,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총리로 하는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 정권은 자민당의 정권 복귀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으며, 정책적으로는 현행 헌법 존중, 소비세 인상, 자위대와 미일 안보 조약 유지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사회당의 정책 변화와 사키가케의 쇠퇴, 연립 내 불일치 등으로 인해 1998년 각외협력 종료와 함께 해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라야마 도미이치 - 무라야마 내각 (개조)
무라야마 내각 (개조)는 1995년 8월 8일부터 1996년 1월 11일까지 재임했으며, 21명의 각료 중 16명이 교체되는 대규모 개각이 이루어졌다. - 무라야마 도미이치 - 오이타현 제1구
오이타현 제1구는 일본 중의원 의원 선거구로, 오이타시 서부를 관할 구역으로 시작하여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며, 자민당과 비자민 후보가 경쟁하는 지역이다. - 하시모토 류타로 - 헤이세이 연구회
헤이세이 연구회는 자유민주당 내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을 중심으로 성장한 정치 파벌로, 여러 지도자를 거치며 일본 정치에 영향을 미쳤으나 파벌 정치 심화 및 정경유착 비판 속에서 2024년 정치단체 신고 철회로 전환점을 맞았다. - 하시모토 류타로 - 제1차 하시모토 내각
제1차 하시모토 내각은 1996년 1월 11일부터 1996년 11월 7일까지 존속한 일본의 내각이며,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대신으로 선출되어 자민당 단독 내각으로 출범했다. - 일본 사회민주당 - 사회민주당 (일본)
사회민주당 (일본)은 1996년 일본사회당에서 개칭된 정당으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며 헌법 9조 수호, 사회복지 확대, 평화주의, 탈핵 등을 정책으로 삼고 있으며, 현재는 후쿠시마 미즈호가 당수이다. - 일본 사회민주당 - 도이 다카코
도이 다카코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헌법학자로, 일본사회당과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일본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당수이자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고,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에 기여, 진보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납북자 문제 대응 및 당 운영에 대한 비판과 친북 성향 논란 등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자사사 연립 정권 | |
---|---|
자사사 연립 정권 | |
![]() | |
개요 | |
존속 기간 | 1994년 6월 30일 ~ 1996년 1월 11일 (1년 6개월 12일) |
정치적 성향 | 중도주의 |
지지 기반 | 도시 지역의 중산층 보수 성향 유권자 진보 성향 유권자 |
주요 정책 |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추진 사회 보장 제도 개혁 평화주의 외교 정책 추진 |
참여 정당 | |
주요 정당 |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 |
지도자 |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사회당) 고노 요헤이 (자유민주당) 다케무라 마사요시 (신당 사키가케) |
역사적 배경 | |
배경 | 1993년 미야자와 내각 불신임 결의 통과 55년 체제 붕괴 비자민 연립 정권 출범 및 단명 |
주요 사건 | 무라야마 내각 출범 한신·아와지 대지진 발생 지하철 사린 사건 발생 총선거 실시 |
정치적 영향 | |
긍정적 평가 | 정치 개혁 추진 사회당의 헌법 해석 변경 자민당의 변화 유도 |
부정적 평가 | 정책 혼선 야기 정치적 이념의 불일치 유권자의 혼란 초래 |
참고 문헌 | |
서적 | 야마구치 지쓰오, 『자사사 연립 정권』, 이와나미 신쇼, 1995년 후쿠다 고타로, 『55년 체제 붕괴와 자민당』, 주코 신쇼, 1994년 |
논문 | 이토 다카시, 「자사사 연립 정권의 정치적 의미」, 『현대 일본 연구』, 1996년 |
2. 역사적 배경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오자와 이치로는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중심으로 7개 야당을 모아 연립 정권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오자와의 독단적인 정책 결정에 대해 사회당과 사키가케는 불만을 가졌다. 이념 차이가 컸던 사회당은 하타 내각이 수립되자 연립에서 이탈했고, 사키가케도 각외협력으로 전환하여 하타 내각은 소수 여당 정권으로 전락했다.[11]
자민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야당이 되자 여당 복귀를 강하게 원했다. 다케시타 노보루, 노나카 히로무,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은 사회당과의 연립을 구상했다. 사회당이 연립에서 이탈한 직후부터 자민당은 가지야마 세이로쿠 전 간사장을 중심으로 '참모본부'를 구성해 사회당과의 연립을 추진했다. 이들은 '리버럴 정권을 만드는 모임'과 '헌법문제연구회'라는 두 그룹을 만들어 사회당과의 연립 정권을 준비했다.[11]
1994년 6월 23일, 자민당은 하타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사키가케는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차기 총리로 제안했다. 6월 29일, 하타 쓰토무는 불신임안 통과 후 중의원 해산을 우려해 본회의 한 시간 전에 사임하고 가이후 도시키를 차기 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오자와와 호소카와는 자민당 출신인 가이후를 내세우면 자민당 내에서 이탈표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 이탈표는 예상보다 적었다. 사회당 내에서도 자민당과의 연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탈표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결국 투표 결과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로 선출되어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했다.
세리가와 요이치는 자사사 연립 정권에 대해 "자민당은 우에서 좌로, 외견은 상관없이 정권을 되찾고자 했던 에피소드다"라고 평가했다.[15]
2. 1. 자민당과 사회당의 연립 과정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오자와 이치로는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중심으로 7개 야당을 모아 연립 정권을 발족시켰지만, 사회당은 신생당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연립에서 이탈했다. 사키가케도 각외협력으로 전환하여 하타 내각은 소수 정권으로 전락했다.[11]창당 이래 처음으로 야당 생활을 경험한 자민당은 여당 복귀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다케시타 노보루, 노나카 히로무,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은 사회당과의 연립까지 구상했다. 자민당은 가지야마 세이로쿠 전 간사장을 중심으로 '참모 본부'를 구성하여 사회당과의 연립을 위한 공작을 시작했다. 이들은 '리버럴 정권을 만드는 모임'과 '헌법문제연구회'라는 두 그룹을 통해 사회당과의 연립 정권 수립을 위한 정책 연구를 진행했다.[11]
'리버럴 정권을 만드는 모임'에는 자민당에서 아이자와 이치로, 아베 신조, 에토 세이이치 등이, 사회당에서 가네다 세이이치, 나카오 노리유키 등이 참여했다. '헌법 문제 연구회'에는 자민당에서 이시하라 신타로, 마쓰오카 도시카쓰가, 사회당에서 기타자와 기요토시, 아키바 타다토시가 참여했다.[2]
1994년 6월 23일, 자민당은 하타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사키가케는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차기 총리로 제안했다. 6월 29일, 가이후 도시키를 차기 총리 후보로 내세웠으나, 투표 결과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했다. 사회당 내에서도 자민당과의 연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자치노동조합이 무라야마 옹립을 단행하면서 반대는 힘을 잃었다.[2]
2. 2. 무라야마 내각의 출범
1994년 6월 30일, 하타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사회당 위원장이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여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했다.[12] 무라야마는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와 사키가케 대표 다케무라 마사요시에게 전면적인 협력을 요청하며, 각각 외무상과 대장상 직을 제안했다.[12]고노는 이 제안에 대해 미야자와 기이치에게 상담했는데, 미야자와는 "외무상을 맡아야 한다. 일본은 미국과의 신뢰 관계 없이 나아갈 수 없다. 실체는 사회당 정권이 아니며 외교의 책임은 자민당 총재인 당신이 짊어져서 설명해야만 한다"고 조언했다.[12] 다케무라도 외무상을 희망했지만, 무라야마는 다케무라에게는 내정을 담당하는 대장상을, 외교를 담당하는 외무상은 고노에게 맡겼다.[12]
훗날 고노의 회고에 따르면, 무라야마는 자민당 총재가 그렇게 말하면 좋겠지만, 자신이 정말 총리를 맡아도 되는지 계속 물었고, 고노는 자민당 총재인 자신이 부총리 겸 외무상을 맡는 것이 대외적으로 보기에 가장 좋다고 답했다고 한다.[12]
가메이 시즈카는 "자사사 정권은 최대 야당이던 자민당이 연립에서 이탈한 사회당과 손을 잡는 울트라C[13]를 생각한 결과였다. 자민당이 정권에 복귀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뭐든지 사용한다는 집념에서 생긴 것이었다. 따라서 이 정권은 무라야마 총리가 아니고서는 탄생할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14]
3. 정책 강령
- 현행 헌법을 존중하며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 실시를 확실히 한다.
- 세제 개혁의 전제로서 행정 개혁을 단행하며 조건을 붙여 소비세를 인상한다.
- 자위대와 일미안보조약을 유지하고 PKO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후에 무라야마 총리는 자위대 합헌, 안보 유지로 정책을 전환한다)[7]。
-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가입은 무리하지 않고 신중하게 처리한다.
4. 무라야마·하시모토 내각의 주요 정책
5. 연립 정권의 의사결정 시스템
호소카와 내각과 하타 내각의 의사결정은 오자와 이치로와 이치카와 유이치를 중심으로 하는 이치이치 라인이 주도하는 폐쇄적인 시스템이었다.[8] 이러한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반성으로, 일본사회당은 의사결정의 투명화를 주장했다. 그 결과, 1994년 6월에 최고 의사결정 기관인 '여당 책임자 회의'가 설치되었다.[8]
여당 책임자 회의는 자민당 간사장 (모리 요시로), 사회당 서기장 (구보 와타루), 신당 사키가케 대표간사 (하토야마 유키오) 외에 여당 정책조정회의 멤버 중 자민당 3명, 사회당 3명, 사키가케 2명 등 총 11명으로 구성되었다.[8] 이 회의는 특정 인물의 독주를 막는 시스템을 채택했다.[8]
여당 책임자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정부 여당 수뇌 연락회의(총리, 외무상, 대장상, 통산상, 여당 책임자 회의 멤버)의 확인을 거쳐 내각에서 실행되었다. 중요 사항은 무라야마 도미이치와 고노 요헤이 간의 당수 회담을 통해 확인했다.[8]
세부 정책 조정을 위해 여당 책임자 회의에 준하는 의사결정 기관으로 여당 원내총무회를 설치하고, 그 산하에 여당 정책조정회의와 국회대책위원장회의를 설치했다.[8]
구분 | 자민당 | 사회당 | 사키가케 |
---|---|---|---|
여당 원내총무회 | 후카야 타카시(좌장), 무라오카 겐조, 미야시타 소헤이, 호리 코스케, 카메이 요시유키, 타니가키 사다카즈, 오시마 타다모리, 이와사키 준조, 타자와 토모하루 | 모리이 타다요시(좌장), 야마시타 야스오, 세키야마 노부유키, 이케하타 키요카즈, 스즈키 카즈미, 오이카와 카즈오, 후치카미 사다오 | 토카이 키사부로(좌장), 간 나오토, 아라이 사토시 |
여당 정책조정회의 | 카토 코이치, 호리 코스케, 오카노 히로시 | 세키야마 노부유키, 타구치 켄지, 와라시나 미츠하루 | 간 나오토, 이가라시 후미히코 |
6. 자사사 체제의 한계
1996년 10월 20일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거치면서 자사사 연립 정권은 한계에 직면했다. 사회당의 급진적인 정책 변화와 사회민주당으로의 당명 변경은 기존 지지층의 이탈을 초래했다.[9] 이에 신사회당 등 일부 의원과 조직은 반발하여 분열했고, 사회당과 사키가케 양당에서 많은 의원이 탈당하여 민주당을 결성했다.
총선 결과, 사회당과 사키가케는 의석수가 크게 줄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반면 자민당은 의석을 늘렸고, 신진당에서 이탈한 의원들을 흡수하여 중의원 과반수를 회복했다. (1997년 9월) 총선 후 구성된 제2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사회당과 사키가케는 각외협력으로 전환했다.
1997년에는 오키나와 특별조치법, 장기 이식법 등에서 연립 내 불일치가 발생했다. 사키가케의 쇠퇴와 도이 다카코 위원장 체제하의 사회당의 교조주의화로 자민당과의 관계는 경색되었다. 자민당은 신진당 내 구 공명계와의 연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98년 6월,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은 사회당, 사키가케와의 각외협력을 종료했다.[9]
참조
[1]
뉴스
高村正彦 (11)初入閣 自社さ野合批判は心外 靖国参拝「暗黙の了解」に驚き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7-08-11
[2]
서적
自・社連立政権政治家・官僚人脈地図
株式会社双葉社
2017-05-26
[3]
뉴스
河野洋平氏「宮沢元首相が『外交責任、自民総裁が負うべきだ』と」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4-09-14
[4]
간행물
村山富市、「責任は自分が取る」とすべてを任せた名宰相
週刊現代
2018-12-29
[5]
서적
平成政権史
日本経済新聞出版社
2018
[6]
서적
私は闘う
文藝春秋
1996
[7]
간행물
政界三強鼎談、今学ぶべきは誰の内閣は、政権交代二年でこの体たらく憂国三銃士が吠える、石原慎太郎・野中広務・亀井静香・司会後藤謙次
文藝春秋 (雑誌)
2011-10
[8]
서적
自・社連立政権政治家・官僚人脈地図
株式会社双葉社
2017-05-26
[9]
뉴스
村山首相誕生、辞表を懐に忍ばせ… 河野洋平・自民党元総裁に聞く(中) 永田町アンプラグド コラム(経済・政治)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3-08-13
[10]
뉴스
「令和の政治家は国のために死ねるのか」自民党重鎮・深谷隆司氏が振り返る平成
https://news.nicovid[...]
BLOGOS
[11]
문서
'리버럴 정권을 만드는 모임'에는 자민당 소속 의원인 [[아이사와 이치로]], [[아베 신조]], [[에토 세이이치]], [[오가와 하지메]], [[가와사키 지로]], [[기시다 후미오]], [[구마시로 아키히코]], 시라카와, [[후타다 고지]], [[무라카미 세이이치로]], [[야쓰 요시오]]가, 사회당 소속 의원인 [[가네타 세이이치]], [[나카오 노리유키]], [[이토 히데코]]가 참여했으며 '헌법문제연구회'에는 자민당의 [[이시하라 신타로]]와 [[마쓰오카 도시카쓰]], 사회당의 [[기타자와 세이코]]와 [[아키바 다다토시]]가 참여했다.
[12]
뉴스
고노 요헤이 씨 「미야자와 전 총리 『외교 책임은 자민당 총재가 짊어져야 한다』」 (9월 14일 조간 정계면 관련 인터뷰)
https://www.nikkei.c[...]
니혼게이자이신문
2014-09-14
[13]
문서
어려운 일을 훌륭히 완수해내는 것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일본어 단어.
[14]
간행물
「책임은 내가 진다」며 모든 걸 떠맡은 명재상
슈칸겐다이
2018-12-29
[15]
서적
헤이세이 정권사
니혼게이자이신문출판사
2018
[16]
뉴스
무라야마 전 총리 탄생, 사표를 주머니 속에 품다… 고노 요헤이·자민당 전 총재에게 듣다 (중) 나가타초 언플러그드 칼럼 (경제·정치)
https://www.nikkei.c[...]
니혼게이자이신문
2013-08-13
[17]
문서
산야에 거주하며 수행하는 승려
[18]
웹사이트
「레이와의 정치인은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자민당 중진·후카야 다카시 씨가 회고하는 헤이세이
https://news.nicovid[...]
2019-06-2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